동학농민운동의 진짜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 개혁운동인가, 항일투쟁인가, 복합적 민중운동인가
동학농민운동의 진짜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1. 동학농민운동, 단순한 농민 봉기가 아니었다
1894년 조선 후기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흔히 ‘반봉건·반외세 운동’으로 요약된다. 하지만 이 단순한 도식으로는 이 운동의 진정한 의미와 깊이를 담아내기 어렵다. 동학농민운동은 조선의 뿌리 깊은 사회적 모순과 외세의 압력 속에서 터져나온 복합적인 민중운동이었다. ‘반란’이 아닌 ‘혁명’에 가까웠다는 평가도 있을 정도다.
동학(東學)은 본래 최제우가 창시한 신종교로, 유교·불교·도교를 융합한 평등 사상을 중심에 두고 있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는 사상은 신분제 사회에서 억눌린 민중들에게 강한 울림을 주었다. 이 신념은 단지 종교적 구호에 그치지 않고, 사회 개혁과 자주성을 요구하는 실천적 운동으로 확장된다.
2. 반봉건 운동: 탐관오리 척결과 신분제 타파
동학농민운동이 처음 시작된 배경은 지방의 수탈 구조였다. 전라도 고부의 조병갑이 과도한 세금과 부정한 징수로 농민들의 분노를 자초했고, 이는 고부봉기로 이어졌다. 이후 전국으로 확산된 농민봉기는 단순히 지역적 분노를 넘어 조선 사회의 전반적인 ‘봉건적 질서’에 대한 저항이었다.
농민들은 탐관오리의 척결, 부패 관리의 처벌, 공정한 세금 제도, 노비 해방 등 구체적인 개혁안을 내세웠다. 실제로 전주 화약 이후 농민군은 ‘집강소’라는 임시 자치기구를 설치하고, 지방 행정을 직접 운영하며 공정한 세금과 민생 정책을 펼쳤다. 이것은 단순한 시위가 아닌 체제 전복적 혁명 시도였다.
3. 반외세 운동: 일본·청나라 군대의 개입과 2차 봉기
그러나 동학농민운동은 곧 외세의 침략이라는 더 큰 파도와 맞닥뜨린다. 조선 정부가 고부 사태 진압을 구실로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고, 일본이 텐진조약을 근거로 자국군을 출병시키면서 한반도에 외세가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동학 농민군은 이를 '국권 침해'로 규정하고, 2차 봉기를 통해 반외세 항쟁으로 노선을 전환한다. 농민군은 일본군과 직접 충돌했고, 이는 단순한 개혁운동에서 '항일 무장투쟁'의 성격으로 확장되었다. 결국 우금치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동학농민운동은 무력으로 진압되었지만, 이 시점부터 동학은 ‘반외세·반제국주의’의 민족운동 성격도 띠게 되었다.
4. 복합적 민중운동: 정치·사회·종교를 아우르다
동학농민운동은 한 가지 성격으로 정의하기 어려운 ‘복합 민중운동’이었다. 종교 운동인 동시에 정치 개혁운동이었고, 반봉건적 혁명이자 반외세 항쟁이었다. 당시 민중은 유교 중심의 지배질서에 저항하면서도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열망을 품고 있었다.
동학의 교리 속에는 인내천 사상 외에도, 여성 평등과 노동 존중, 자치적 공동체 정신 등이 담겨 있었다. 이는 단순히 외세를 몰아내고 왕권을 회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조선 사회 전체의 틀을 바꾸려는 시도였다. 실제로 농민군 지도자들은 ‘백성이 주인 되는 세상’을 지향하며, 왕실과 양반 계급의 특권을 폐지하려 했다.
5. 동학의 유산: 3.1 운동과 민주주의 운동의 뿌리
동학농민운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 정신은 훗날까지 이어진다. 1898년의 독립협회 운동, 1919년 3.1운동, 1920년대 농민조합 운동은 물론, 한국 현대사의 민주화 운동 속에도 동학의 평등·자주·민권 사상은 중요한 뿌리로 작용했다.
특히, 동학이 주창한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철학은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인 ‘국민 주권’ 사상과도 맞닿아 있다. 이것이 바로 동학농민운동이 단순한 과거의 농민 반란으로 치부되어선 안 되는 이유다. 조선 말기 최대의 민중운동이자, 한국 역사상 가장 급진적인 사회 혁명 시도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맺음말
동학농민운동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그것은 ‘반봉건’과 ‘반외세’라는 두 개의 축 위에, 민중의 절실한 생존 요구와 평등 사상을 담은 복합적 민중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우리 사회가 가진 모순을 직시하게 하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지금의 우리는, 그들이 꿈꾸었던 세상에 얼마나 가까이 왔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