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은 ‘문화’, 속은 ‘지배’- 일제강점기 ‘문화정치’의 이면과 조선 사회의 변화
겉은 ‘문화’, 속은 ‘지배’
— 일제강점기 ‘문화정치’의 이면과 조선 사회의 변화
1.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무엇이 바뀌었는가?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조선은 철저한 무단통치 체제 아래 놓였습니다. 총독부는 군인 출신 총독을 내세우고, 헌병 경찰 중심의 강압적 통치로 조선을 억눌렀습니다. 표현의 자유는 물론, 교육과 언론도 철저히 검열되었고, 민족정신은 말살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하지만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면서 일본은 조선의 저항 의지를 체감했습니다. 국제 사회의 비판도 거세졌고, 일본은 ‘겉보기’를 바꾸기로 합니다. 바로 **문화정치(文化政治)**입니다. 말 그대로 ‘문화’를 통해 통치하겠다는 명분이었지만, 본질은 통제 방식의 변화였습니다.
문화정치는 더 ‘부드럽고 세련된 억압’이었습니다. 헌병 대신 보통경찰 체제를 도입했고, 한국어 신문과 민간 교육기관도 일부 허용했습니다. 겉으로는 표현의 자유와 자치의 확대처럼 보였지만, 이는 철저히 일본의 통제 안에서만 허용된 ‘유화 정책’이었습니다.
2. 언론, 교육, 종교 자유화의 ‘함정’
문화정치로 인해 신문과 출판의 길이 열렸고,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이 창간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일본 제국주의의 감시 아래에서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기사 하나하나 검열을 거쳤으며, 조선 민중의 의식 고양이나 항일 내용을 담으려 하면 곧바로 폐간과 정간을 당했습니다.
교육 부문에서도 일본은 ‘보통학교’ 설립을 확대하며 조선인의 교육 기회를 넓히는 듯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황국신민화 교육의 확대였습니다. 국어(일본어) 사용을 장려하고, 일본 역사와 천황 숭배 교육을 강화하여 민족 정체성을 약화시키려는 전략이었습니다.
종교 역시 통제의 수단으로 활용되었습니다. 기독교와 천도교는 3·1운동에 중심 역할을 했기에 감시의 대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협조적’인 종교인들과 손잡고 민중을 달래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종교의 자유는 철저히 ‘정권 친화적 종교’에만 허용되었습니다.
3. 민족운동의 다양화와 새로운 지식인층의 등장
문화정치는 단순한 통제 정책이 아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 조선 사회에서는 다양한 민족운동이 더욱 활발히 전개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실력양성운동입니다. ‘총칼 대신 교육과 경제력으로 독립을 준비하자’는 기치 아래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 설립 운동이 펼쳐졌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신문, 출판, 교육 등을 통해 신지식인층이 등장하며, 새로운 민족 담론을 이끌었습니다. 문학과 예술을 통해 사회비판 의식을 표출하거나, 농촌 계몽 운동을 통해 민중의 삶에 직접 개입하는 움직임도 나타났습니다. 물론 이들은 언제든 일제의 검열과 탄압에 직면했지만, 문화정치는 민족운동의 새로운 양상을 가능하게 한 ‘틈’이기도 했습니다.
4. 문화정치의 진짜 의도: ‘지속 가능한 식민지’
결국 문화정치는 ‘민족 통합’이 아닌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고 장기화하려는 일본의 전략이었습니다. 3·1운동 이전에는 억누르고 찍어 누르던 방식이었다면, 이후에는 ‘포장’된 억압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문화와 교육, 언론을 통해 조선인을 일본화(皇民化)하고, 자발적 협력을 유도하려는 고도의 심리전이었습니다.
이 시기의 문화정치가 남긴 결과는 이중적입니다. 억압과 통제를 내포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조선인 스스로 정체성과 독립 의지를 다듬고, 새로운 저항 방식을 창조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결론: 부드러운 억압의 시대를 기억하며
‘문화’라는 말이 붙었다고 해서 결코 그 시대가 자유로웠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얇은 포장 속에 더욱 치밀한 식민지 통치의 본질이 숨어 있었습니다. 일제의 문화정치는, 오늘날에도 ‘권위주의적 유화 전략’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민족의 자주성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그 어떤 시대에도 끊임없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