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고려의 마지막 불꽃, 삼별초의 저항과 ‘섬나라 자치국’ 실험

메이트레인 2025. 7. 30. 10:30

고려의 마지막 불꽃, 삼별초의 저항과 ‘섬나라 자치국’ 실험

1. 고려의 균열 속에서 태어난 무장 집단, 삼별초

13세기 후반, 고려는 몽골의 침입으로 정치·군사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었습니다. 몽골과의 전쟁은 30여 년 이상 지속되며 국토는 황폐화되었고, 국왕은 강화도에서 몽골에 저항하던 시절을 지나 마침내 개경으로 복귀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고려 조정은 원나라와의 굴욕적인 강화를 받아들이게 되죠. 그러나 이에 끝까지 반대한 집단이 있었습니다. 바로 "삼별초(三別抄)"입니다.

삼별초는 원래 최씨 무신정권 시기에 왕실을 보호하고 치안 유지를 맡던 친위부대였지만, 무신정권의 몰락 이후 독자적인 군사 세력으로 재편되며 반몽 투쟁의 선봉에 섭니다. 강화도에 주둔했던 이들은 고려 조정이 몽골에 굴복하고 개경으로 환도하자 이를 배신으로 간주하고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상을 ‘무력으로라도 몽골에 끝까지 저항하는 고려’에 두었고,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고려의 계승자라고 여겼습니다.

고려의 마지막 불꽃, 삼별초의 저항

 

2. 반몽 독립 정부의 시도: 진도와 제주에서의 자치 실험

삼별초의 반기는 단순한 반란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고려 정부와 원나라를 동시에 부정하며, 스스로 왕을 세우고 독립적인 정권을 수립합니다. 처음에는 전남 해안의 진도를 거점으로 삼아 정부 형태를 갖추고 항전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몽골-고려 연합군의 강력한 공세로 진도는 함락되고, 이들은 다시 제주도로 후퇴하게 됩니다.

제주에서 삼별초는 마치 자치국가처럼 독립적인 정치체제와 군사조직을 운용했습니다. 해상 무역 통제를 시도했고, 외국 선박과의 교류도 모색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들은 한때 중국 남송에 사절단을 보내 지원을 요청할 정도로 외교적 자주성을 갖추려 했습니다. 제주라는 고립된 섬에 새로운 고려를 건설하려는 ‘작은 정부’의 실험은 당시 동아시아 역사에서 매우 독특한 사례로 평가받습니다.

 

 

3. 바다에서 싸운 고려의 마지막 군대

삼별초의 군사 전략은 기존의 정규전보다는 유격전과 해상전을 활용한 비정규전에 가까웠습니다. 특히, 남해와 제주 해역에서 벌어진 해상 전투는 몽골군과 고려 수군을 한동안 고전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고려 정부가 가진 수군 조직보다 훨씬 유기적으로 움직였고, 실제로 해적이나 외세의 침입을 막아낸 사례도 전해집니다.

그러나 고립된 환경과 내부 자원의 한계, 그리고 외부의 압도적인 병력 앞에서 결국 이들의 저항은 1273년 몽골-고려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며 종말을 맞이합니다. 삼별초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제주도는 이 무렵 몽골의 직접 지배를 받게 되고, 이후 ‘탐라총관부’라는 명칭 아래 원나라의 행정 단위로 전환됩니다.

 

 

4. 삼별초는 단순한 반란 세력이었을까?

전통적으로 삼별초는 ‘반란군’ 혹은 ‘실패한 군사 정권’으로 평가받아 왔습니다. 하지만 최근의 역사 연구에서는 이들을 단순한 반란군이 아닌, 몽골에 저항한 마지막 민족주의적 세력, 혹은 고려의 군신 중심질서에 저항한 정치적 대안세력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특히 삼별초는 당시 세계 최강이라던 몽골 제국에 맞서 거의 4년에 가까운 시간을 버텼으며, 끝내는 국왕의 명령보다 민중적 정당성에 기반한 정치체제를 시도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삼별초의 항전은 많은 사람들에게 ‘고려의 정신’, ‘자주 독립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5. 역사에 남은 삼별초의 의미

삼별초의 항쟁은 단지 무력 충돌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몽골의 간섭에 굴복한 고려 중앙정부에 대한 저항이자, 자율적인 정치 실험이었습니다. 오늘날 **제주도에는 삼별초의 마지막 항쟁지였던 ‘항파두리 항몽 유적지’**가 남아 있어, 그 치열한 저항의 흔적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삼별초의 역사는 ‘패배한 역사’이자 동시에 ‘끝까지 싸운 자들의 역사’입니다.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단지 왕조가 아닌 고려라는 공동체의 정체성과 자주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정신은 여전히 우리가 기억해야 할 유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