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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의 숙청 이전, 권력의 사유화된 현실

메이트레인 2025. 7. 31. 13:30

기철과 권문세족의 전횡, 고려왕조를 뒤흔든 권력의 사유화

 공민왕의 숙청 이전, 권력의 사유화된 현실

 

기철과 권문세족의 전횡, 고려왕조를 뒤흔든 권력의 사유화

1. ‘기철’이라는 이름이 주는 정치적 함의

고려 말 혼란기의 권문세족 중 대표적 인물로 손꼽히는 기철(奇轍)은 단순한 권세가가 아닌, 권력을 사유화한 상징적인 존재다. 원나라의 강한 외교적 영향력 아래서 고려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으며 입지를 굳힌 ‘기씨 일가’는, 충혜왕·충목왕 시대에 이르러 군주의 위에 군림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기철은 원 황제의 측근이자 ‘원 황후 기씨’의 친오라버니로, 사실상 고려 정치의 그림자 권력자가 되었다.

당시 기철은 좌정승, 첨의중찬 등을 역임하며 국가의 군사권, 인사권, 재정권을 장악했다. 심지어 국왕의 결정에도 veto를 행사할 정도로 정치적 입김이 강했다.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 기록들은 대부분 "권세를 남용하여 민심을 잃었다"는 비판을 담고 있으며, 조선 시대 사관들도 "나라의 기강이 무너진 것은 기씨의 전횡 때문"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2. ‘기씨 가문’의 족벌체제: 사익을 위한 공권력의 해체

기철이 속한 기씨 가문은 일가 전체가 권력을 독점하며, 조정을 장악했다. 기철의 형제들은 고위 관직을 나눠 가졌고, 심지어 지방 행정까지도 그들의 영향 아래 있었다. 그들은 중앙정부의 인사권을 사적으로 이용해 자신의 측근들을 요직에 앉혔으며,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거두는 데도 착취적 방식을 서슴지 않았다.

이 시기 고려의 관료제는 '공직은 능력이 아니라 혈연과 연줄로 얻는 것'이라는 인식을 굳히게 되었고, 중앙과 지방 간의 행정적 신뢰는 거의 붕괴했다. 기씨 일가의 지배는 단지 하나의 가문이 권력을 쥐었다는 사실 이상으로, 국가 시스템이 족벌체제로 전락했다는 구조적 위기를 반영하고 있었다.

 

3. 공민왕의 즉위와 기씨 척결의 정치적 승부수

기철 일가의 몰락은 공민왕의 즉위와 함께 시작되었다. 원나라의 간섭을 배제하고 자주적인 정치 기반을 다지고자 했던 공민왕은 기씨 일가의 권력을 가장 먼저 겨냥했다.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공민왕은 기철을 포함한 기씨 일가를 급습했고, 수십 명에 달하는 가족과 측근들을 처형하거나 유배시켰다.

이 사건은 단순한 숙청이 아니라, 고려 정치사에서 원나라와 결탁한 외척 세력을 제거하고 자주권을 회복하려는 결정적인 정치 개혁이었다. 공민왕은 이 사건을 통해 중앙 집권적 통치 기반을 강화하고, 고려의 정체성과 권위를 재정립할 수 있었다.

 

4. 기철과 권문세족, 그리고 고려 사회의 구조적 병폐

기철의 전횡은 단지 개인이나 가문의 욕망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려 후기 사회는 오랜 무신정권의 여파, 몽골의 간섭, 왕권 약화, 그리고 문벌귀족의 폐쇄적인 특권 구조가 겹쳐져 있었다. 이러한 구조 안에서 기씨 가문은 ‘도구화된 권력’을 최대한 활용한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단순히 권력을 휘둘렀다는 점이 아니라, 권력에 기대 사유지를 확장하고, 농민을 부속인처럼 취급하며 사회 양극화를 심화시켰다는 점이다. 토지와 인력의 집중은 국가 재정 기반을 붕괴시켰고, 반대로 중앙정부의 개입력은 점차 약화됐다. 결국 이러한 사회 구조는 고려 말의 정치적 혼란, 민란, 외침에 대한 대응력 부족으로 이어졌다.

 

5. 역사적 교훈: 사익 추구의 권력이 국가를 어떻게 무너뜨리는가

기철 일가의 사례는 한국사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권력의 사유화’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국가 권력이 특정 가문이나 계층에 의해 독점되면, 법과 제도는 사적으로 왜곡되고 사회 전체의 기능은 마비된다. 고려는 기씨 가문에 의해 ‘왕조국가’에서 ‘가문국가’로 전락한 시기를 경험했고, 그것은 결국 몰락으로 귀결되었다.

공민왕의 숙청은 권력을 정상화하려는 시도로서 의미가 있지만, 기철 이전의 구조적 문제를 뿌리 뽑지 못한 채 조선으로 넘어간 점은 또 다른 고민거리다.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기득권의 사유화’와 ‘공권력의 탈정치화’는 여전히 중요한 주제다.

 

마무리

기철 일가는 고려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권문세족의 극단적 사례다. 이들의 전횡은 단지 왕조 내부의 권력 다툼이 아니라,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구조적 고민을 남긴다. 부패한 권력의 말로는 언제나 자명하다. 그러나 그 폐해는 단지 권력자 한 명의 몰락으로 끝나지 않고, 백성과 제도의 붕괴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더욱 뼈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