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악(正樂)은 조선 왕조에서 주로 궁중 의례, 제례, 연향(잔치) 등에 사용되던 정제되고 엄숙한 양식의 음악을 말합니다. 주로 문묘제례악, 종묘제례악, 보태평·정대업 같은 아악 계통의 음악과, 연례악 및 연향악 등이 이에 포함됩니다. 이 음악은 유교적 질서와 왕권의 위엄을 상징하는 문화유산이자, 철저하게 체계화된 의식 음악이기도 합니다. 조선 초기, 특히 세종과 세조 때에 정비된 이후로 수백 년간 큰 변동 없이 유지되었으며, 이는 음악을 통한 국가 이념의 구현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2. ‘가가쿠(雅楽)’는 어떤 음악인가?
일본의 가가쿠(雅楽)는 문자 그대로 ‘우아한 음악’을 의미하며, 일본 왕실과 귀족층이 향유하던 궁정음악입니다. 이 음악의 기원은 5세기~9세기경 중국과 한반도를 통해 들어온 당악(唐樂), 백제악, 신라악, 고려악 등 외래 음악에서 비롯되었으며, 이후 일본 고유의 악기 및 음악과 융합되어 독자적 형식을 갖추게 됩니다. 오늘날까지도 일본의 황궁이나 주요 사찰 등에서 연주되는 이 음악은, 외래문화의 수용과 재창조라는 일본 고유의 특징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3. 백제-신라-조선을 거친 음악, 일본으로 건너가다
가가쿠의 역사적 뿌리를 살펴보면, 한반도에서 건너간 음악의 흔적을 선명하게 찾을 수 있습니다. 특히 백제와 신라는 일본에 다수의 악사(樂師)를 파견했고, 당시 일본 궁정은 이들을 우대하며 음악·악기·춤 등을 배웠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직접적인 파견은 줄었지만, 조공 사절단이나 통신사를 통해 조선 음악의 영향이 이어졌습니다. 15세기 이후에는 문헌으로 정리된 정악의 악보나 악기 구조, 연주법 등을 통해 일본 측에 일정 부분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조선 후기의 ‘아악’ 악보가 일본에 건너가 당시 가가쿠 체계에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합니다.
4. 악기와 음계의 유사성: 문화 교류의 흔적
정악과 가가쿠에는 악기 구성이나 음계 구조에서 유사한 점이 존재합니다. 양국 모두 대금(笛), 피리, 해금과 유사한 현악기, 박(拍)과 같은 타악기 등을 중심으로 편성합니다. 특히 일본의 ‘히치리키(篳篥)’는 한국의 향피리와 매우 유사한 음색을 가지고 있으며, ‘쇼(笙)’는 우리나라 생황(笙簧)과 구조가 거의 동일합니다. 이 같은 악기의 유사성은 단순히 기원의 공유뿐 아니라 실제 연주 방식과 음색의 공통성을 통해 정악의 요소가 일본 궁정 음악 안에 스며들었음을 시사합니다.
5. 정악은 일본 궁정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조선의 정악이 일본 가가쿠에 미친 영향은 형식의 정제, 악기 사용, 의례적 정서에서 확인됩니다. 정악의 특징인 엄격한 악장 구조와 반복적 리듬, 의례 중심의 사용 방식은 일본에서도 비슷하게 흡수되어, 가가쿠는 의례 중심 음악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특히 일본 궁정에서 연주되는 가가쿠의 느린 템포와 정제된 선율은 조선의 정악과 매우 유사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6. 단절과 재조명: 현대에서 다시 만나는 정악과 가가쿠
일제강점기 이후 조선 정악은 큰 위기를 겪었지만, 국립국악원 중심의 복원 노력과 함께 최근에는 일본과의 공동 학술 연구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가가쿠를 연구하는 일본 음악학자들은 정악의 악보나 연주 기록을 참고해 자신들의 전통을 재정비하는 데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반대로 한국의 국악계는 가가쿠 보존 방식에서 배우는 점이 많다고 평가합니다. 이는 동아시아 음악의 상호교류와 전통문화의 현대적 가치를 재발견하는 흐름으로, 새로운 문화외교의 장이 될 수 있습니다.
마치며: 사라지지 않은 음악의 기억
정악과 가가쿠는 단순한 ‘과거의 음악’이 아닙니다. 이는한국과 일본이 공유한 문화의 흔적이자, 전통의 현대화를 위한 중요한 자산입니다. 음악이라는 예술을 통해 두 나라의 왕조는 서로를 이해했고, 오늘날 우리는 그 교차점을 통해 동아시아 정체성의 다층적 면모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악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곧, 한국 문화의 정체성과 그 영향력을 되짚는 일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