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건국 직후, 새로운 왕조의 지도자들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는 ‘땅과 사람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었다. 고려에서 이어받은 행정 체계는 불완전했고, 국경과 지방의 실태에 대한 정보는 제각각이었다. 중앙에서 명령을 내려도 지방의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다면 정책은 공허한 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정보를 파악하는 것은 예산과 인적자원이 너무도 부족했다. 세종은 이를 통감했고, 전국의 지형과 자원, 인구, 행정 구역을 정밀하게 조사해 하나로 엮는 대규모 국가 프로젝트를 구상하게 되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세종실록지리지』다.
2. 『세종실록지리지』 편찬의 배경과 과정
1454년, 세종실록의 한 부분으로 편찬된 이 지리서는 조선 최초의 전국 종합 지리지였다. 세종은 전국 8도의 관찰사와 수령에게 명을 내려, 각 고을의 산과 강, 성곽, 호구 수, 토지 비옥도, 특산물, 역참과 교통로 등을 세밀하게 보고하게 했다. 예산을 확보하고 인적자원을 모았다. 당시 조선은 산적, 호랑이 등의 위험한 요소가 굉장히 많았기에 이는 신중하게 진행되었다. 자료 수집은 몇 단계에 걸쳐 진행되었다. 먼저 지방에서 작성한 보고서를 한성으로 올리면, 중앙에서는 이를 비교·검증해 오류를 걸러냈으며, 필요하다면 따로 실사단을 파견해 사실 여부를 확인하게 하였다. 이렇게 축적된 자료를 유학자와 서리들이 표기 규칙에 맞춰 통일 정리했는데, 당시의 편찬 과정을 보면 현대 행정 데이터베이스 구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3. 지리 정보가 곧 통치 기술
『세종실록지리지』는 단순한 지리 안내서가 아니었다. 군사 전략에서는 각 지역의 성곽 위치와 방어력, 병력 동원 가능 규모, 보급로를 분석하는 데 쓰였고 이는 조선이 지속되는 내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세금 행정에서는 토지의 비옥함과 특산물 정보를 기반으로 세율과 공물 품목을 조정했다. 또한 수해나 가뭄이 잦은 지역을 기록해 재해 대응 계획을 세우는 데 활용했고, 주요 교통로와 수운로를 파악해 역참망을 효율적으로 운영했다. 한마디로, 이 지리서는 15세기판 국가 운영 매뉴얼이나 다름없었다.
4. 한반도의 공간 질서 재편
지리서 편찬은 단순한 행정 편의가 아니라, 한반도의 공간 질서를 새롭게 그려내는 작업이었다. 지방 행정 단위의 경계가 명확해졌고, 고을의 위계와 역할이 제도적으로 규정되었다. 이를 통해 중앙의 시야가 변방까지 미치게 되었으며, 국경 지대 관리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는 조선이 초기부터 비교적 안정적인 통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고 중앙집권화를 통한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였다.
5. 후대 지리지로 이어진 발전
『세종실록지리지』의 뒤를 이어 성종 대에는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었다. 이는 군사·행정 중심이었던 세종 지리지에 역사, 인물, 문화 정보를 덧붙여 조선판 지역 백과사전으로 발전시켰다. 18~19세기에 들어서는 『대동지지』와 같이 서양식 측량법과 지도 제작 기법이 반영된 지리서도 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모든 발전의 기초에는 세종 대왕의 첫 지리서 편찬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6. 오늘날의 가치와 의미
『세종실록지리지』는 오늘날에도 중요한 사료로 쓰인다. 고지도 복원, 역사 지리학, 기후사 연구 등에서 당시의 인구 분포, 농업 환경, 자원 분포를 복원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조선이 국가 경영의 출발점으로 ‘지리 정보’를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현대 국가가 GIS(지리정보시스템)와 빅데이터를 통해 정책을 설계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맺음말
세종 대의 지리서 편찬 사업은 ‘지도 위에 나라를 세운다’는 말이 어울리는 국가 전략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는 종이 위에 그려진 한반도 전체의 모습을 바탕으로, 행정·군사·경제를 설계한 조선판 데이터 과학 프로젝트였다. 15세기의 이 기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국가 운영의 교과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