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조선인 군속과 군인의 그림자

조선인 군속과 군인의 그림자: 강제와 자발 사이, 일제에 복무한 이들의 삶

프롤로그: 전쟁터로 향한 조선인들, 그들은 누구였나

일제강점기 말기, 조선은 전쟁 수행에 필요한 ‘인적 자원 창고’로 전락했습니다. 많은 조선인들이 군인이나 군속으로 동원되었고, 그중 일부는 자발적으로, 더 많은 수는 반강제적으로 일본의 침략 전쟁에 동참해야 했습니다. 흔히 강제징용으로 기억되는 이 시기의 조선인들 가운데, 군속과 군인으로 복무한 이들의 삶은 의외로 복잡하고, 또 조용하게 잊혀졌습니다. 이들은 어떤 이유로, 어떤 방식으로 일본군에 복무하게 되었을까요?

강제와 자발 사이, 일제에 복무한 이들의 삶

1. 군속(軍屬)이란 무엇인가?

총 대신 삽을 든 조선인들의 존재

‘군속’이란 군인이 아닌 신분으로 군을 지원하는 민간인을 뜻합니다. 정식 군인은 아니지만 군사 작전에 동원되어 병참, 통역, 기술, 간호, 운송 등 다양한 보조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이들은 겉으론 민간인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군사조직의 일원으로 전쟁터에 투입됐습니다. 대우는 군인보다 훨씬 열악했고, 계급도 없으며 전사해도 '전사자'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1940년대 들어 태평양 전쟁이 격화되면서 군속의 수요는 급증했고, 조선인 군속은 1944년 기준 148,000여 명에 달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일본 본토, 중국 대륙, 동남아시아 전선 등에서 노동을 강요받았습니다.

 

2. 조선인 군인의 실체

'황군'의 이름 아래서 총을 든 조선인들

처음엔 일본군 복무가 조선인에게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확대되면서 인력 부족에 시달린 일본은 1938년 ‘지원병 제도’를 도입합니다. 겉으론 자발적 모집처럼 보였지만, 사실상 사회적 압박과 경제적 궁핍 속에서 '선택 아닌 선택'을 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지원병 제도는 이후 1943년부터 징병제로 전환되며 더욱 강제성을 띠게 됩니다. 1944년부터 본격적으로 조선 청년들이 일본군으로 강제 징집되었고, 조선인 징병자는 약 24만여 명에 달합니다. 이들은 남양군도, 버마, 인도, 필리핀, 중국 전선에 배치되며, 일본군의 전투 병력으로 활용됐습니다.

 

3. 자발적 지원자도 있었을까?

자발성과 강압의 경계

‘자발적 지원자’라는 표현은 항상 논란의 대상입니다. 분명히 지원한 형태였지만, 취업 기회, 생계의 어려움, 일본인 사회에서의 차별 극복 등을 이유로 선택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일부는 신분 상승의 기회로 여기기도 했으며, 실제로 일본군에서 훈련을 받고 장교가 되어 소수의 조선인 장교도 탄생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극히 일부의 이야기였고, 대부분은 자발성이라기보다는 구조적인 강압 속에서 이루어진 선택이었습니다. 이를 두고 "자발과 강제 사이의 회색 지대"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4. 전쟁터에서의 조선인 군속·군인의 현실

생존과 고통의 최전선

조선인 군속과 군인들은 일본군 내에서도 차별을 받았습니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위험한 임무, 혹독한 훈련, 열악한 숙식이 주어졌고, 전사 시에도 일본인 병사만큼의 예우는 없었습니다. 일부는 인도네시아나 필리핀 등지에서 포로가 되거나, 종전 후 귀국하지 못한 채 현지에 정착하게 된 사례도 있습니다.

특히 군속은 군인의 보호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의료 지원도 제한적이었고, 노동 중 부상이나 사망 시 유족 보상도 거의 없었습니다.

 

5. 해방 이후 그들의 삶

영웅도, 반역자도 아닌 잊힌 사람들

해방 후, 조선인 군속·군인들은 이중의 고통을 겪습니다. 일본군에 복무했다는 이유로 ‘친일파’ 낙인이 찍혔지만, 정작 당시에는 국가나 사회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던 시대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입을 다문 채 조용히 생을 마감하거나, 가족들에게조차 당시의 일을 말하지 못한 채 살아갔습니다. 일부는 귀국하지 못하고 남방에서 후손을 남기며 현지에 정착했고, 그들의 존재는 점차 역사에서 지워졌습니다.

 

에필로그: 누가 그들을 심판할 수 있는가

조선인 군속과 군인의 삶은 단순히 친일이냐 아니냐의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는 복잡한 역사입니다. 강제성과 자발성의 경계, 국가 없는 식민지 백성으로서의 선택지, 전쟁의 야만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인간의 처절한 생존 이야기.

그들은 영웅도, 반역자도 아닌 시대의 희생자였을 수 있습니다. 이제는 이들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역사 회복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