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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의 혼돈 — ‘건국준비위원회’와 좌우 합작 실패의 뿌리를 찾아서

광복 이후의 혼돈 — ‘건국준비위원회’와 좌우 합작 실패의 뿌리를 찾아서

광복 이후의 혼돈 — ‘건국준비위원회’

1. 해방의 순간, 뜨거운 공허함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항복 선언과 함께 한국은 35년간의 식민 지배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준비되지 않은 해방은 곧 정치적 공백을 낳았고, 그 속에서 다양한 정치 세력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오랜 망명 생활과 항일 투쟁을 통해 민족 독립을 꿈꿔온 인사들은 해방 직후, ‘과연 누가 새로운 국가를 이끌 것인가’라는 질문에 직면했다.

이때 등장한 조직이 바로 **건국준비위원회(건준)**였다. 여운형을 중심으로 결성된 이 조직은 해방 직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국가를 준비하는 ‘임시정부’의 역할을 자처했다. 그러나 이들이 꿈꾼 ‘중도 좌파적’ 통합 정치는, 곧 미군정의 등장과 보수 우파의 반발에 직면하면서 위태로워졌다.

 

2. 건국준비위원회: 이상과 현실 사이

1945년 8월 16일, 여운형은 조선총독부와 협상을 통해 치안과 행정을 조선인이 주도하는 체제로 이양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건국준비위원회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춘 사실상의 자치정부로 빠르게 확장되었다. 그들은 토지개혁, 인민위원회 조직, 경찰 통제 등의 개혁을 시도하며, 민중 중심의 국가 건설을 꾀했다.

그러나 건준은 태생적으로 명확한 정통성과 권위가 결여돼 있었다. 특히 우익 세력과 미군정은 건준을 ‘친공산주의 조직’으로 간주하며 불신했고, 점차 건준은 사회주의자 중심의 조직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미군정은 9월 초 건준 해체를 공식 요구했고, 건준은 곧바로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개편되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3. 미군정의 등장과 ‘좌익 배제’ 전략

1945년 9월 8일, 미국은 일본과의 항복 조약을 이행하며 38도선 이남에 미군을 진주시켰다. 이로써 조선은 미국과 소련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이 되었다. 미군정은 조선의 독립과 자치를 준비하기보다는, 반공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 결과 건준 계열의 좌익 세력은 배제되었고, 친일 경력이 있는 우익 인사들이 미군정과 손잡고 정치권에 진입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미군정은 ‘우익은 반공, 좌익은 친소’라는 단순 이분법적 시각으로 조선을 바라보았으며, 이러한 판단은 좌우의 타협 가능성을 점점 더 좁혀놓았다.

 

4. 좌우 합작 운동의 빛과 그림자

이런 갈등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46년, 여운형과 김규식은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 안을 전제로 한 좌우 합작 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중도좌우 세력을 규합해 조선 내부의 자율적 통합을 이루려 했으며, 제헌의회를 통한 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높았다. 우익 세력은 이를 ‘소련의 의도에 동조하는 반역 행위’라 규정했고, 좌익은 우익과의 타협을 ‘계급 배신’이라 비판했다. 여운형은 1947년 암살당했고, 김규식은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결국 좌우 합작은 외세의 개입과 내적 불신 속에 끝내 결실을 맺지 못했다.

 

5. 실패로 남은 꿈, 그러나 남겨진 교훈

건국준비위원회와 좌우 합작 운동은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났지만, 이들이 던진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자주적 국가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이념을 넘어 민중과 사회의 안정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라는 고민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해방 직후의 혼란은 단순한 좌우의 대립을 넘어서, 민족 내부의 신뢰 붕괴와 외세 의존의 그림자를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만약 좌우 합작이 성공했다면, 한국의 정치사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결론: 갈라진 길에서 다시 묻는다

광복은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준비 없는 해방과 분단, 그리고 좌우의 대립은 ‘우리 스스로의 국가를 만들 힘’이 부족했음을 보여준다. 건국준비위원회와 좌우 합작의 좌절은 실패한 역사로 남았지만, 그 안에는 오늘날 우리가 다시 마주해야 할 질문이 담겨 있다. 이념보다 사람을, 외세보다 자주를, 대립보다 연대를 추구하는 정치 — 그것이 바로 이 시대가 잊지 말아야 할 ‘건준의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