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대사에서 ‘삼국시대’는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의 경쟁 구도로 인식된다. 그러나 그들만이 이 시기의 주인공은 아니었다. 경상북도 고령을 중심으로 번영했던 대가야는 5세기~6세기 한반도 남부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군사적 존재였다.
대가야는 초기 가야 연맹 중 가장 오랜 기간 존속한 세력이었고, 후기에는 가야 연맹 전체를 주도하며 독자적인 외교 전략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신라·백제와의 삼각 구도를 형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의 명칭에서 배제된 것은, 최종적으로 국가적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신라에 병합된 역사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대가야가 보여준 국제 외교 능력과 내정 체계는 신라 못지않은 성숙함을 드러낸다. 이는 ‘삼국’이라는 협소한 시각을 넘어, ‘사국시대’로 보는 관점이 최근 학계에서 주목받는 배경이기도 하다.
잊혀진 제4의 강국, 대가야
2. 철기로 다져진 대가야의 군사력과 산업 기반
대가야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발달된 철기 문화다. 낙동강 유역은 철 생산의 보고였고, 이를 기반으로 대가야는 무기 제조, 농기구 생산, 심지어 교역품으로서의 철기 수출까지 가능했다.
출토된 유물 가운데, 세련된 철제 갑옷·투구, 말 방어구는 고대 동아시아에서도 보기 드문 수준으로 평가된다. 이는 대가야가 단순한 지역 세력이 아닌, 군사력으로 주도권을 쥘 수 있는 국가적 기반을 갖췄음을 보여준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 등에서 확인된 대형 고분과 함께 출토된 철제 유물은, 귀족층의 무력 중심 통치와 철을 둘러싼 권력 구조를 잘 설명해준다. 당시 대가야는 철을 통해 주변 소국들을 영향력 아래 두었고, 그것이 바로 가야연맹의 수장이 될 수 있었던 동력이다.
3. 일본 열도와의 교류, 그리고 외교 네트워크
대가야는 교역과 외교에서도 상당한 능력을 보였다. 특히 일본 열도와의 연결 고리는 대가야 외교 전략의 중요한 축이었다. 일본의 ‘고훈 시대’ 고분에서 출토된 가야계 토기, 철기류는 대가야인의 활동을 입증해준다.
이러한 교류는 단순한 무역을 넘어 정략결혼, 사신 교환, 기술 전수 등 다층적이었다. 일본서기에는 가야계 도래인들이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기록도 있으며, 이들 중 상당수가 대가야 출신으로 추정된다.
뿐만 아니라 대가야는 백제와도 외교 채널을 유지하며 때로는 신라와의 삼각 외교 전략을 전개했다. 외세와의 연대를 통해 내부 결속을 다지고, 강대국 간의 균형을 꾀한 것이다. 이런 외교적 균형 감각은 고대 한반도에서 보기 드문 고도의 정치력이다.
4. 신라에 흡수되기까지: 대가야의 최후
대가야는 6세기 중엽, 사비로 천도한 백제와 한강 유역 진출에 성공한 신라 사이에서 점차 압박을 받았다. 특히 진흥왕의 정복 전쟁은 대가야의 독립을 위협했다.
562년, 신라는 전략적으로 ‘사다함’을 중심으로 대가야를 공격했고, 결과적으로 대가야는 무너지고 가야사의 막을 내린다. 그러나 대가야는 최후까지 독자적 왕권을 유지했고, 전투에서도 완전한 붕괴보다는 점진적인 흡수 통합의 형태를 보였다.
무너진 이후에도 대가야의 문화와 인력은 신라 내 귀족층, 군사 조직, 산업 기반으로 통합되어 신라의 체질 개선에 크게 기여했다. 단순한 정복이 아닌, 융합의 역사로 보는 시각이 필요한 대목이다.
5. 묻힌 역사를 복원하다: 대가야의 재조명
오늘날 대가야는 ‘잊혀진 고대 국가’에서 벗어나, 고령 대가야박물관, 지산동 고분군의 세계유산 등재 추진, 다양한 고고학 발굴 성과를 통해 재조명되고 있다.
특히 고령 지산동에서 발굴된 왕릉급 고분은, 대가야 왕권의 강력함과 철기 문화의 정점을 보여주는 대표적 유산이다. 현대에 와서야 사국시대론의 핵심 사례로 떠오르고 있는 대가야는, 한국 고대사에서 결코 주변국이 아니었다.
대가야는 철기로 다져진 실리적 군사 강국이자, 외교로 성장한 문화적 중심국이었다. 우리가 삼국 시대를 넘어 ‘사국’으로 시야를 넓혀야 하는 이유는, 이처럼 역사의 공백에 묻힌 진짜 주인공들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