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요나라·여진족, 외교와 분열의 삼각외교전
— 중세 동북아를 흔든 전략적 줄다리기
서론: 격동하는 국경, 세 세력의 미묘한 공존과 충돌
고려와 요나라, 그리고 여진족. 이 세 세력은 단순한 인접국 관계를 넘어서, 상호 견제와 활용, 갈등과 공존이 얽힌 복잡한 삼각외교의 구도를 이루었습니다. 특히 여진족을 둘러싼 고려와 요나라의 정책은 오늘날 동북아 외교사의 중요한 사례로 평가됩니다. 단순히 ‘변방의 민족’으로 치부되던 여진족은 사실상 양국 사이의 외교전에서 핵심 변수로 작용했고, 고려는 이들을 단순히 적으로만 대하지 않고 전략적 동반자이자 견제의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1. 요나라와 고려, 그리고 여진족의 지정학적 위치
요나라는 거란족이 세운 제국으로, 고려 북쪽에 위치하며 강한 군사력과 외교력을 바탕으로 고려를 끊임없이 압박했습니다. 한편 여진족은 만주 일대에 흩어져 거주하던 반유목·반정착민족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이 없는 대신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고려와 요나라는 국경을 맞댄 상태였으며, 여진족은 그 사이에 위치한 셈입니다. 이로 인해 여진은 고려에겐 완충지대였고, 요나라에겐 잠재적 위협이자 동원 가능한 병력 자원이었습니다.
2. 고려의 여진족 포섭 전략: ‘화친과 이간질’
고려는 여진족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거나 정벌하는 대신, 조공 관계를 통해 외교적 포섭을 시도했습니다. 여진 추장들에게 관직과 칭호를 하사하며 고려의 ‘형님국가’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고자 한 것이죠. 이를 통해 여진 내부의 부족 간 갈등을 활용하거나, 요나라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고려는 일부 여진 부족에게는 농기구·비단·소금을 지원하고, 다른 부족에겐 군사적 압박을 가해 서로 견제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른바 ‘분열 통치(divide and rule)’ 전략의 초기 형태입니다.
3. 요나라의 여진 통제 시도: 강제 동화와 무력 압박
요나라 역시 여진족을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두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했습니다. 여진 부족 중 일부는 요나라에 귀속되기도 했고, 거란군에 의해 정복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진족은 자주성을 유지하며 양국을 저울질하는 전략을 펼쳤고, 이로 인해 요나라는 점차 무력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요는 여진을 완전히 지배하지 못했고, 오히려 군사적 강압은 여진의 반감을 부추겨 향후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우는 데 일조하게 됩니다.
4. 고려와 여진 간 갈등의 현실: 국경 충돌과 방비 전략
여진족은 고려 북부 국경을 빈번히 침범하며 약탈을 벌였고, 이에 대응해 고려는 천리장성을 축조하며 국경을 방어했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물리적 충돌만이 아니라, 내부적으로는 여진과의 교역과 인질 외교도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11세기 후반, 여진이 더욱 강성해지자 고려는 이들을 견제하는 동시에 ‘이용’하는 양면 외교를 펼치며 국익을 도모했습니다. 때로는 여진 추장을 고려 관직에 임명하고, 때로는 국경에서 충돌하며 명분을 쌓았습니다.
5. 중장기적 파장: 금나라의 등장과 고려 외교의 변화
결국 12세기 초, 여진족은 금나라를 세우고 요나라를 멸망시킵니다. 이는 동북아 권력 구도의 대전환이었고, 고려 역시 이에 발맞춰 대외 정책을 조정해야 했습니다.
여진족의 급부상은 단순한 세력 교체가 아닌, 고려가 여진을 전략적으로 포섭하고 활용해왔던 외교 정책이 결국 새로운 질서를 예고했음을 의미합니다. 고려는 금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으면서도, 여진족의 이질성과 침략 가능성에 대비해 계속해서 북방 방어 체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결론: 변방은 언제나 중심을 흔든다
여진족을 둘러싼 고려와 요나라의 외교전은 단순한 국경 분쟁을 넘어서, 지정학적·문화적 다층 외교의 상징이었습니다. 고려는 강대국 사이에서 지혜로운 생존 전략을 펼쳤고, 여진족은 이 삼각 구도 속에서 존재감을 키우며 새로운 강국으로 도약했습니다. 변방의 민족이라 여겼던 여진은 결국 역사의 중심으로 떠올랐고, 고려의 신중한 외교는 그런 변화를 감지하고 대처해온 역사적 유산으로 평가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