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대 문자는 처음부터 ‘국산품’이 아니었다. 삼국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한반도에는 토착 문자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기록과 공식 문서는 모두 중국에서 유입된 한자를 차용했다. 그 가운데 독특한 방식이자 고유의 문자처럼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이두(吏讀)다.
‘이두’는 순수한 문자 체계라기보다 한자를 빌려 고유어를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신라·고구려·백제 등 삼국은 중국과 교류하며 한자를 받아들였고, 이 한자를 문법적으로 재조립하거나 독음을 차용하여 한국어를 기록하려 했다. 그 시도의 대표 격이 이두다.
이두는 한자의 의미뿐만 아니라 발음까지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예컨대 신라어의 어순은 주어-목적어-동사 순으로 현대 한국어와 같았지만, 한자는 중국식 어순을 따른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신라인들은 한자의 뜻은 유지하되, 어순과 조사, 어미 등을 조작하여 자신들의 언어 구조에 맞추는 방법을 개발했다.
2. 실용의 언어, 신라 관료 문서에서 발견된 이두
이두는 단순한 문학적 실험이 아니라, 실제 관료 행정에서 널리 쓰였다. 가장 중요한 이두 문서 중 하나는 신라의 행정문서와 관청 관련 기록들이다. 고분에서 출토된 목간(木簡)이나 죽간(竹簡) 등에서는 농지 관리, 세금 징수, 노동 동원 등을 기록한 이두 문서를 다수 발견할 수 있다.
특히 경주 황남대총, 금관총, 감은사터 등지에서 발굴된 목간은 당시 관청에서 사용하던 문서 양식을 보여준다. 이들은 행정 실무에서 ‘읽기 쉬운 문장’을 만들기 위해 이두를 도입했다. 한문을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하던 하급 관리나 지방 관청에서는, 뜻도 통하고 발음도 익숙한 이두식 문장을 더 선호한 것이다.
이러한 문서에는 예컨대 ‘以奴婢五人田三十結’(노비 다섯 사람, 논 삼십 결을 가지고…)와 같이, 현대 한국어 어순에 가까운 표현들이 한자 문장 안에 혼합되어 있었다. 이는 단지 한자를 번역하는 수준이 아니라, 이미 신라인들이 자신의 언어를 문자화하는 능력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3. 귀족의 말 아닌 백성의 언어, 이두는 구어체의 보물창고
이두는 흥미롭게도 고급 문학보다는 실용문서에서 더 많이 등장했다. 이는 이두가 학문적 권위보다는 현실적 필요에 따라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구어체를 반영했다는 점에서, 이두는 오늘날 한국어의 뿌리를 찾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한국어의 조사 사용, 종결 어미, 높임 표현, 어순 구조 등은 당시 이두 문서에서 이미 나타난다. 예를 들어 동사의 종결 표현인 ‘-이다’, ‘-하니라’ 등의 형태가 그대로 보이며, 조사 ‘-의’, ‘-에’, ‘-을’ 등의 사용도 확인된다.
이는 단순히 ‘한자를 빌려 썼다’는 차원을 넘어, 고대 한국어가 어떤 구조를 가졌는지를 구체적으로 증명하는 자료다. 당시의 귀족 문헌이 한문으로 쓰인 데 비해, 이두는 실생활에서 쓰인 문서에 주로 등장했기 때문에, 민중의 언어, 구어체의 실상을 잘 보여주는 셈이다.
4. 사라진 문체의 흔적, 후대 문헌과 언어학적 가치
이두는 고려시대까지도 사용되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훈민정음이 창제되면서 점차 쇠퇴하게 된다. 하지만 언어학적 가치는 오히려 더욱 커졌다. 이두를 통해 우리는 고대 한국어와 현대 한국어 사이의 문법적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으며, 특히 말과 글이 분리되어 있던 시대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열쇠가 된다.
국립한글박물관이나 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도 이두 문서의 복원과 해석 작업이 지속되고 있으며, 이두에 사용된 고유어 어휘, 음운 변화, 조사 체계는 한국어사의 중요한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5. 고대 한국어의 자취를 좇는 여정
이두는 단지 한자 문서의 변형이 아니라, 고대 한국인의 언어 감각과 창조성을 보여주는 유산이다. 문자 이전의 말을 기록하고, 민중의 삶을 반영했으며, 조선 이전 한국어의 실체를 일부라도 엿보게 해준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실로 지대하다.
이제 우리는 사라진 이두 문서를 통해 신라인의 음성, 백성의 언어, 관료의 일상을 상상해볼 수 있다. 구어를 기록하려 했던 고대의 그 손끝에서, 오늘날 우리의 말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도 경이로운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