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 흔히 우리는 그를 "고려 말 무장 집안 출신", "고려의 충신이자 개혁가"로 기억하지만, 이성계의 뿌리를 깊이 들여다보면 의외의 사실 하나가 드러난다. 바로 그의 가계가 외국인에서 시작된 ‘이민자 가문’이었다는 점이다. 한민족 중심의 국가라는 인식 속에서 왕조 창건자의 외래 혈통은 자칫 불편한 진실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조선이라는 나라의 포용성과 혼합의 역사를 드러내는 단서가 된다.
2. 이성계 가계의 시작: 신라를 떠돌던 이한경의 정체
조선왕조실록과 고려사 등 사료에 따르면, 이성계의 시조는 이한경(李漢卿) 또는 이자연(李子淵)으로 불린다. 그는 본래 신라 말기 때 한반도 북방 지역에 정착한 외래 인물로, 함경도 지역에서 살며 토착 세력화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그의 활동 무대가 된 영흥(현 북한 함경남도 일대)는 당대에도 여진족, 거란족, 고려인 등이 혼재한 다민족 접경 지역이었다. 그의 후손들은 대를 이어 무관으로 성장했고, 결국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원나라의 충신이자 고려의 무장으로 활동하며 가문을 공고히 다졌다.
3. 여진계 혹은 송나라계? 설이 엇갈리는 출신 배경
이성계 가문이 ‘외국계’라는 주장은 다양한 사료와 견해에서 비롯된다.
첫 번째는 여진족 설이다. 이성계의 가계가 함경도 지역에 뿌리를 내렸고, 그의 이름 ‘성계(成桂)’ 또한 여진식 명명법에 가깝다는 분석에서 유래한다.
두 번째는 송나라계 이민자 설이다. 일부 학자들은 그의 조상이 송나라에서 망명하거나 무역을 위해 이주해온 이민자라고 본다. 이 주장의 근거는 성씨 ‘이(李)’ 자체가 중국계 고유 성씨라는 점과, 고려 시기의 귀화 관례에서 비롯된다.
세 번째는 고려 귀화 호족 설이다. 즉, 신라 말~고려 초의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북방계 혼혈 귀화인이 된 것이라는 해석이다.
확정된 진실은 없지만, 이성계 가문의 외래 혈통 가능성은 다양한 사료와 문헌의 분석을 통해 충분히 제기되고 있다.
4. 외국계 가문이 고려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
고려는 본질적으로 개방적이고 다문화적인 국가였다. 거란·여진·몽골·송 등 주변 민족과의 교류, 그리고 잦은 전쟁과 사신 파견, 이민, 혼인이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특히 변방 지역의 실력자들은 국경을 방어하는 무장 세력으로서, 고려 왕실로부터도 일정한 독립성과 권력을 부여받았다. 이자춘 가문 역시 이 체계 안에서 성장했고, 결국 이성계가 고려 말 최대의 군벌로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또한, 몽골 제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고려 후기 사회는 다문화적인 혼합을 전혀 낯설게 여기지 않았다. 이성계의 외가(조모)는 몽골계라는 주장도 있을 만큼, 지배층 사이에서는 ‘순수 혈통’이라는 개념이 그리 절대적이지 않았다.
5. ‘역성혁명’의 아이러니: 혈통과 정통성의 정치학
이성계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열었지만, 역성혁명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의 가문을 ‘고귀한 혈통’으로 포장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공식 사서에서는 조상들의 외래성을 희석시키거나 은유적으로 기술했다. 그러나 당시 사회에서는 외래 혈통이 꼭 흠결로 여겨지지 않았기에, 이성계가 그런 조상 배경을 숨기거나 부끄러워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도리어 그는 무장 가문으로서의 실력과 북방 국경 방어 경험을 내세워 새 왕조의 정당성을 강조했고, 이는 조선 초 신흥 사대부 세력과도 맞아떨어지는 정치적 언어였다.
6. 이민과 혼혈로 만들어진 한국사: 통합의 유산
이성계의 사례는 한국사가 순수 혈통 중심이 아니라, 이민과 혼합, 통합을 통해 형성된 역사임을 잘 보여준다. 북방계 민족과의 융합, 중국과의 교류, 심지어 몽골과의 통혼까지 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1,000년의 흐름 속에서 한국은 수많은 ‘혼합’을 겪었다.
그렇기에 이성계의 외국계 조상 이야기는 단순한 ‘이색적 사실’이 아니라, 한국사의 개방성과 적응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에피소드다. 이방인의 후손이 조선을 세웠고, 그 조선은 다시 수백 년간 한반도의 질서를 이끌었다. 역사는, 언제나 순수보다 혼합에서 더 강한 생명력을 얻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