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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로 다리를 잇다: 정약용과 ‘거중기’, 조선 공학의 르네상스를 열다

기술로 다리를 잇다: 정약용과 ‘거중기’, 조선 공학의 르네상스를 열다

정약용과 ‘거중기’, 조선 공학의 르네상스를 열다

 

1. 조선 후기, 철학자만으로 보기엔 부족한 정약용

조선 후기 실학의 거목으로 꼽히는 정약용(1762~1836)은 단순히 사상가나 개혁가로 기억되기엔 아쉬운 인물입니다. 그는 경세치용(經世致用), 즉 '세상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학문'을 지향한 실학자였고, 실용적 지식을 바탕으로 백성의 삶을 개선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정치제도 개혁에 대한 제언은 물론, 농업, 토목, 의학, 군사, 형벌 등 수많은 분야에서 저술 활동을 남긴 그는 '조선 르네상스형 인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정약용은 '기술'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결과물 중 하나가 바로 거중기(擧重機)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도구 발명을 넘어, 조선식 공학의 수준을 상징하는 중요한 이정표였습니다.

 

2. 거중기의 구조와 작동 원리: 조선판 크레인의 등장

거중기는 오늘날의 크레인에 해당하는 도구로,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리고 옮기기 위한 기계였습니다. 정약용은 이 기계를 고안하여 1794년(정조 18년) 수원 화성 건축 현장에 실제로 사용했습니다. 이 장치는 도르래 원리를 기반으로 하며, 적은 힘으로도 무거운 물체를 들어 올릴 수 있게 설계되었습니다.

거중기는 일반적으로 세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첫째, 수직 지지대인 ‘기둥’이 중심을 잡고, 둘째, 기둥 꼭대기에 설치된 회전 장치와 도르래가 중량을 분산하며, 셋째, 줄을 당기는 방식으로 물체를 천천히 들어 올릴 수 있도록 조정했습니다. 정약용은 이 기계를 활용하여 수십 명이 들어야 했던 돌을 3~4명이 손쉽게 다루게 함으로써 노동력의 효율화를 이뤄냈습니다.

 

3. 실용을 향한 집념: 『기예론』과 기술철학

정약용은 거중기를 단순한 현장 기술로 끝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기계를 어떻게 설계하고, 어떻게 작동하며, 실제 어떤 결과를 만들어냈는지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기예론(技藝論)』이라는 기술 철학서에 담았습니다.

이 책은 단순한 설명서나 설계도 그 이상으로, “기술은 백성을 위한 도구”라는 정약용의 철학이 담겨 있는 실용 학문서입니다. 그는 학문이 실생활에 응용되지 못하고 유학적 이상에만 갇혀 있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기예론』은 기술을 통해 사람의 삶을 개선하고 국가의 토목 사업을 능률화하며, 자연을 인간이 통제 가능한 영역으로 삼을 수 있다는 ‘실학’의 결정체였습니다.

 

4. 수원 화성: 조선식 토목 기술의 종합 현장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으로 옮기고, 이를 기념하는 수원 화성을 건립하며 조선 기술력의 진면목을 세상에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이 때 정약용은 거중기를 활용해 화성 축성 과정의 많은 부담을 덜어주었습니다.

수원 화성은 외세에 대응하기 위한 군사 요충지였을 뿐 아니라, 당대 기술과 미학이 집약된 구조물이었습니다. 거중기는 특히 성곽의 돌을 쌓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이를 통해 보다 정밀하고 안전한 시공이 가능해졌습니다. 정조는 이 업적을 높이 평가하며 정약용에게 다양한 후속 프로젝트를 맡겼으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그의 행정 경력은 오래 지속되진 못했습니다.

 

5. 서양과 다른 조선식 과학 기술의 접근법

흥미로운 점은, 정약용이 거중기를 고안한 시점이 서양의 산업혁명 초기와 비슷한 시기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조선은 증기기관이나 금속공업이 발달하지 않았고, 기계적 기술보다는 자연의 원리를 모사한 간단하지만 정교한 도구에 집중했습니다. 정약용의 공학은 철학적 기반 위에 구축된 실용 기술로, 백성을 힘들이지 않고 일하게 만드는 데 초점이 있었습니다.

이는 서양의 대규모 동력 시스템과는 다르지만,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효과적인 결과를 낳았다는 점에서 ‘조선식 공학’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6. 조선의 기술자 정약용을 다시 보다

정약용의 삶을 단순히 유교 사상가, 정치 개혁가로만 본다면 그의 반쪽만 보는 셈입니다. 그는 백성을 위한 기술을 설계하고, 이를 실천하며 기록으로 남긴 진정한 엔지니어이자 공학자였습니다. 거중기는 그 상징적인 결과물이며, 조선 후기의 기술력과 실용 정신을 증명하는 기념비적 발명입니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과학기술’은 주로 서구의 패러다임에 의존하고 있으나, 정약용의 사례는 우리 고유의 기술철학과 응용 지식이 존재했음을 상기시켜줍니다. 그의 거중기는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조선 후기 실학과 과학이 만난 지점에서 탄생한 위대한 유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