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직후 서울의 ‘치안 공백기’와 자치 경찰의 탄생
— 미군정 이전, 스스로 질서를 지키려 했던 시민들의 조직화
1. 해방의 기쁨과 동시에 찾아온 혼란
1945년 8월 15일, 조선은 일본의 패망과 함께 해방을 맞이했다. 그러나 환희와 감격의 물결 뒤에는 곧 심각한 사회 혼란이 뒤따랐다. 일제 경찰과 행정기관은 갑작스럽게 붕괴했고, 일본인 경찰과 관리들은 서둘러 철수했다. 공권력의 중심이 사라지면서 서울은 그야말로 ‘치안 공백기’로 돌입했다. 강도, 절도, 폭력 사건이 급증했고, 해방의 혼란을 틈탄 무장 집단과 불량배들의 활동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들은 “이대로는 안 된다”는 절박함 속에 스스로 질서를 세우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했다.
2. 시민 자치 경찰의 첫걸음
공권력이 붕괴된 상황에서 가장 먼저 치안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나선 것은 지역 사회의 유지, 청년 단체, 상인회 등이었다. 이들은 일본 경찰서가 비워둔 건물이나 지역 회관을 임시 거점으로 삼아 ‘자치 경찰대’를 조직했다. 자치 경찰은 무기를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았지만, 나무 곤봉이나 일본군이 버린 소총, 심지어 농기구까지 활용하며 순찰을 돌았다. 이들은 낮에는 장터와 주요 도로, 밤에는 주택가와 창고를 돌며 절도와 폭력 사건을 막기 위해 애썼다.
3. 조직 구조와 활동 방식
자치 경찰대는 대개 자발적으로 모인 시민들이 중심이었지만, 곧 체계적인 조직이 필요해졌다. 각 구역마다 ‘대장’과 ‘구역장’을 두고, 순찰조를 편성했다. 순찰은 2~3인 1조로 움직이며, 정해진 시간마다 교대로 수행되었다. 주요 임무는 절도 방지, 폭력 사건 예방, 우발적인 분쟁 중재였다. 또한 일제의 잔재로 남은 무기와 군수품의 불법 거래를 단속하기 위해 창고나 역 주변을 집중 감시했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자치 경찰대가 단순히 치안 유지에 그치지 않고, 식량 분배 질서 유지와 실종 아동 찾기 같은 사회복지적 활동도 함께 했다는 것이다.
4. 해방 공간의 정치와 자치 경찰
광복 직후의 서울은 단순한 혼란만이 아니라, 정치적 격변의 무대이기도 했다. 좌익과 우익 세력이 모두 치안 부문에 개입하려 했고, 각 진영은 ‘자기 편의 치안 조직’을 만들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따라 자치 경찰대 일부는 정치 세력과 결합했고, 순수 시민 조직이 점차 정치화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다수의 시민들은 “정치보다 질서 유지가 우선”이라며 중립을 지키려 노력했다. 실제로 당시 한성부 일대에서는 좌우 세력의 충돌을 중재하는 ‘중립 자치 경찰대’가 활동한 기록도 남아 있다.
5. 미군정의 개입과 자치 경찰의 해체
1945년 9월 8일, 미군이 한반도 남부에 진주하며 미군정 체제가 시작되었다. 미군정은 치안 유지 권한을 자신들의 통제 아래 두기 위해 ‘조선 경찰’을 재편성하고, 일본 경찰 출신과 일부 한국인 경찰을 다시 채용했다. 이 과정에서 자치 경찰대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고, 무기는 회수되었다. 일부 자치 경찰대원은 미군정 경찰로 편입되었지만, 많은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다른 생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6. 역사적 의의와 오늘날의 시사점
광복 직후의 자치 경찰대는 짧은 기간 활동했지만, 그 의미는 크다. 첫째, 공권력 공백 속에서 시민 스스로 질서를 지키려는 집단적 노력의 사례라는 점에서 ‘자율 치안’의 전형이었다. 둘째, 비록 무장과 제도적 기반은 미약했지만, 사회 혼란을 최소화하고 일상 회복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셋째, 오늘날 재난 상황이나 국가 시스템 마비 시, 지역 단위의 자율적 대응 체계 필요성을 보여주는 역사적 선례다.
7. 결론: 혼란 속에서도 빛난 시민의식
광복 직후 서울의 자치 경찰은 단순히 ‘임시 치안 조직’이 아니었다. 그것은 주권을 되찾은 시민들이 처음으로 ‘우리의 도시를 우리가 지킨다’는 의지로 만들어낸 공동체적 치안 시스템이었다. 비록 미군정 하에서 사라졌지만, 그 경험은 이후 한국 사회의 자율성과 시민 연대 의식 형성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 정리
- 활동 기간: 1945년 8월 15일 ~ 9월 초 미군정 시작 전까지
- 주요 구성원: 청년단, 상인회, 지역 유지, 일반 시민
- 주요 활동: 순찰, 범죄 예방, 분쟁 중재, 식량 분배 질서 유지
- 역사적 의미: 치안 공백 속 자율 조직의 필요성과 가능성 증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