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는 단순한 행정 중심지가 아니라, 고대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체계적인 도시계획을 보여준 수도였다. 8세기 후반, 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과 문왕 시기에 완성된 이 도시는 직선과 대칭을 중시하는 격자형 구조를 바탕으로 건설되었으며, 이는 당나라 장안성과 유사한 도시 모델을 따른 동시에 발해만의 정치·문화적 색채를 가미한 것이었다. 중심부에는 웅장한 궁궐이 위치했고, 그 외곽에는 관청, 주거지, 시장, 사찰이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었다. 이러한 구조는 발해가 국제무역과 행정 효율성을 동시에 고려했음을 보여준다.
궁궐과 행정구역 — 왕권과 관료제가 만나는 공간
상경 용천부의 핵심은 궁궐 지구였다. 고고학 발굴 결과, 궁궐은 중심축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었고, 정전(正殿)과 편전(便殿), 후원(後苑)이 엄격한 위계에 따라 배치되었다. 정전은 국가의 공식 의식과 외국 사신 접견에 사용되었으며, 편전은 국정 회의와 실무 관리를 위한 공간이었다. 궁궐 서쪽과 동쪽에는 각각 군사·사법 관청과 재정·상업 관청이 배치되어 왕권과 관료제가 물리적으로 연결되도록 설계되었다. 이는 권력의 중심이 궁궐에서 행정기관으로 곧바로 이어지도록 하는 ‘직접 지배형’ 수도 구조였다.
불교 사찰과 국제 교역의 거점
상경 용천부에는 불교 사찰이 다수 존재했으며, 이들은 단순한 종교 공간을 넘어 국제 외교와 문화 교류의 거점 역할을 했다. 일본과의 사절단 왕래, 신라 및 거란과의 외교 관계, 심지어 당나라 상인들과의 무역까지, 사찰은 외국인 거주지와 가까운 위치에 자리하며 문화 혼합의 중심지가 되었다. 발해 사찰 건축은 목조건축과 석축기단이 조화를 이루었으며, 일부 사찰에는 중국 당풍의 전각과 함께 발해 특유의 곡선 지붕 장식이 확인된다.
격자형 도로와 시장 — 효율성과 상징성의 결합
발해의 도로망은 남북과 동서를 가르는 직선 도로가 일정한 간격으로 교차하는 전형적인 ‘방형 격자’ 구조였다. 각 구역(방, 坊)은 주거지, 시장, 관청, 사찰 등 기능에 따라 나누어졌다. 중심 시장은 궁궐 남쪽 대로변에 위치하여, 궁중 의례에 필요한 물품 공급과 대규모 상업 활동이 가능했다. 시장에서는 발해산 모피, 해산물, 인삼과 같은 특산품뿐 아니라, 당나라 비단, 일본 도자기, 아라비아 유리 제품 등이 거래되었다. 이는 상경 용천부가 단순한 내륙 행정 수도가 아니라 동북아 해상·육상 실크로드의 중요한 교차점이었음을 보여준다.
방재와 환경 고려 — 고대의 ‘지속 가능 도시’
상경 용천부는 지형적으로 북쪽에 산, 남쪽에 강이 위치한 배산임수(背山臨水) 형태로 건설되었다. 이러한 입지는 방어에 유리했을 뿐 아니라, 도시 내 물 공급과 배수 시스템에도 도움을 주었다. 일부 발굴에서는 목제 수로와 배수구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강수량이 많은 여름철에도 홍수를 예방하고 위생을 유지하려는 의도였다. 또한 궁궐 주변에는 대규모 방화벽이 설치되어, 화재로부터 핵심 시설을 보호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첨단의 방재 설계였다.
상경 용천부의 쇠퇴와 역사적 의의
9세기 말 이후, 발해는 거란과의 군사적 갈등, 내부 정치 불안, 그리고 경제 기반의 약화로 인해 점차 쇠퇴했다. 926년 거란에 의해 멸망한 후, 상경 용천부는 급속히 폐허가 되었지만, 그 도시계획과 건축기술은 발해 후계 문화권과 고려, 조선의 수도 건설에도 영향을 주었다. 현대의 고고학 발굴과 복원 연구는 발해가 결코 ‘변방의 왕국’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국제적인 시야와 기술력을 갖춘 국가였음을 증명한다.
맺음말 — 잊힌 수도에서 배우는 도시의 미래
상경 용천부는 단순한 고대 수도가 아니라, 효율적인 행정 운영, 방재 설계, 국제 교류, 그리고 문화 융합이 동시에 이뤄진 복합 도시였다. 오늘날 스마트시티나 지속 가능 도시 개발의 원리를 고대에서 찾는다면, 발해의 수도가 훌륭한 교과서가 될 수 있다. 발해의 도시계획은 과거의 유산이지만, 그 안에는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통찰이 숨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