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의 세금과 권력 — 고려의 ‘선박세’와 해상 교역 네트워크
― 동아시아 무역의 중심에서 번영을 거둔 고려의 항만 경제 ―
1. 고려의 바다, 교역의 황금로
고려 시대의 해상은 단순한 항해로가 아니라, 부와 권력이 흐르는 거대한 네트워크였습니다.
중국 송나라와 일본, 나아가 동남아시아까지 연결된 교역로에는 고려의 주요 항구들이 자리했고, 이곳을 오가는 선박들은 각국의 물자와 문화를 실어 날랐습니다. 이로 인해 무역이 점차 늘어나자, 고려의 대외 무역은 그 규모를 더욱더 키워나가게 됩니다.
이러한 국제 교류의 중심에서 고려는 ‘선박세(船舶稅)’라는 독특한 제도를 운용하며 국가 재정을 보강했습니다.
이 세금은 단순히 돈을 거두는 수단이 아니라, 고려가 해상 질서를 통제하고 무역권을 유지하는 중요한 장치였습니다.
2. ‘선박세’의 기원과 부과 방식
선박세는 고려가 입항하는 외국 및 국내 상선을 대상으로 부과한 세금으로, 화물의 종류·양·배의 크기에 따라 달리 책정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대형 무역선이 항구에 들어오면 선박 톤수에 비례해 세금을 내야 했고, 고가품을 실은 경우 별도의 ‘상품세’가 더해졌습니다.
세금은 주로 현물로 거둬졌는데, 비단·향료·도자기·철기 등이 세금 항목에 포함되었습니다.
이는 국가 창고를 풍족하게 했을 뿐 아니라, 외국 물품을 국내로 들여와 재분배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이는 생각보다 합리적으로 책정되었는데, 합리적인 세금은 각 국가의 무역선들의 수가 점차 증가하는 주요 이유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3. 주요 항구와 세금 거점
선박세 징수의 핵심은 고려의 대표적 무역항이었습니다.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는 고려-송 교역의 최대 거점으로, 송나라 상선이 대규모로 입항했습니다.
동해안의 울진·삼척은 일본 및 북방과의 교역로를 담당했고, 남해안의 영산포·나주는 동남아 무역선의 기착지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 항구에는 관세 담당 관청과 세곡 창고가 설치되어, 입항과 동시에 세금을 거두고 통관 절차를 밟았습니다.
4. 선박세의 외교적 의미
선박세는 경제적 이익뿐 아니라 외교적 상징성이 컸습니다.
세금을 낸다는 것은 곧 고려의 해상권과 항만 통제권을 인정하는 행위였습니다.
특히 고려는 해적 활동이 잦은 동아시아 해역에서 ‘해상 안전 보장’을 명분으로 세금을 정당화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국제 해양법의 ‘항로 보호 비용’ 개념과도 유사했습니다.
또한, 선박세를 통해 확보한 재정은 해군 운용과 항만 시설 유지에도 쓰였습니다.
5. 무역 품목과 재정 효과
고려의 해상 무역은 중국의 비단·서적·도자기, 일본의 황·동, 동남아의 향료·보석 등을 포함한 고가품 거래가 중심이었습니다.
선박세 수입은 국가 재정의 중요한 축이 되었고, 일부는 왕실 행사나 외교 사절단 접대에도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항만 인근 도시의 시장과 수공업이 발달하는 데도 기여했습니다.
벽란도는 ‘국제도시’라 불릴 만큼 다양한 언어와 문화가 공존했으며, 세금으로 확보한 물자는 이러한 도시 문화를 뒷받침했습니다.
6. 해상 질서와 군사적 활용
고려는 선박세를 거두는 동시에, ‘수군(해군)’을 활용해 무역선을 보호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세금 징수가 아니라 해상 치안 유지와 직결된 조치였습니다.
당시 왜구와 해적은 무역의 큰 위협이었는데, 고려는 세금을 통해 재원을 마련해 이를 대응했습니다.
항구마다 초소와 관망대가 세워졌고, 군선이 순찰하며 무역선의 안전을 확보했습니다.
7. 원·명 교체기와 해상권 변화
14세기 후반 원나라가 약화되고 명나라가 부상하면서, 동아시아 해상 질서에도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명나라는 ‘해금 정책’을 실시하며 사무역을 금지했지만, 고려는 기존의 무역 네트워크를 유지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명의 통제 강화와 일본의 해적 세력 확대로 선박세 수입은 점차 줄어들었고, 조선 건국 이후 ‘조운 제도’와 ‘공무역 체제’가 이를 대체하게 됩니다.
8. 고려 선박세의 역사적 의미
고려의 선박세 제도는 단순한 세금이 아니라, 국가의 해상권·무역권을 상징하는 제도였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국제항만 사용료’와 ‘관세’를 합친 개념으로, 경제·외교·군사·문화의 복합적인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특히 고려가 동아시아 해상 무역의 중심지로 번영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제도를 기반으로 한 항만 관리 체계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