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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실의 비밀 회의록, ‘비변사등록’ 조선 왕실의 비밀 회의록, ‘비변사등록’— 정치 권력의 민낯이 드러나는 외교·군사 기록의 보고서1. ‘비변사등록’이란 무엇인가?조선 시대, 국정 운영의 핵심은 왕과 신하들의 논의였다. 특히 외교와 군사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설치된 임시 기구가 바로 비변사(備邊司)다. 원래는 변방을 대비하는 임시회의였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점차 상설화되었고, 정조 이후에는 사실상 조선 최고의 정치 기구로 자리잡았다.그 회의의 상세한 내용이 기록된 문서가 바로 『비변사등록』이다. 비변사등록은 단순한 회의록을 넘어서, 당대 최고 권력자들 간의 정책 충돌과 심리전, 권력 다툼까지 생생히 담고 있어 ‘조선의 비밀 외교 문서’라고 불릴 만하다. 2. 회의록 속 진짜 전쟁: 칼보다 날카로운 언쟁비변사 ..
겉은 ‘문화’, 속은 ‘지배’- 일제강점기 ‘문화정치’의 이면과 조선 사회의 변화 겉은 ‘문화’, 속은 ‘지배’— 일제강점기 ‘문화정치’의 이면과 조선 사회의 변화1.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무엇이 바뀌었는가?1910년 한일병합 이후, 조선은 철저한 무단통치 체제 아래 놓였습니다. 총독부는 군인 출신 총독을 내세우고, 헌병 경찰 중심의 강압적 통치로 조선을 억눌렀습니다. 표현의 자유는 물론, 교육과 언론도 철저히 검열되었고, 민족정신은 말살의 위기에 처했습니다.하지만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면서 일본은 조선의 저항 의지를 체감했습니다. 국제 사회의 비판도 거세졌고, 일본은 ‘겉보기’를 바꾸기로 합니다. 바로 **문화정치(文化政治)**입니다. 말 그대로 ‘문화’를 통해 통치하겠다는 명분이었지만, 본질은 통제 방식의 변화였습니다.문화정치는 더 ‘부드럽고 세련된 ..
고구려 고분 벽화 속 신앙과 상징-고대 제국이 남긴 미스터리의 정체? 고구려 고분 벽화 속 신앙과 상징— 고대 제국이 남긴 미스터리의 정체는 무엇인가?1. 찬란한 예술, 고구려 벽화의 정체성고구려 고분 벽화는 단순한 무덤 장식이 아니라, 고대인의 사상과 종교, 세계관이 집약된 살아있는 사료입니다. 4세기부터 7세기까지 황룡강 유역과 평양 일대에서 발견된 고분들은 그 안에 화려한 채색 벽화들을 담고 있으며, 특히 강서대묘, 무용총, 장천1호분 등은 세계적으로도 주목받는 문화유산입니다. 이 벽화들은 고구려인의 생활상은 물론이고, 사후세계와 신화를 상징하는 다양한 신비로운 존재들을 담고 있어 후대에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2. 일상과 신화의 경계, 벽화 속 세계관벽화에 등장하는 소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고구려인의 일상생활—수렵, 연회, 무용—이고, 다른 하나는..
동학농민운동의 진짜 목표: 반봉건 vs 반외세 동학농민운동의 진짜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개혁운동인가, 항일투쟁인가, 복합적 민중운동인가1. 동학농민운동, 단순한 농민 봉기가 아니었다1894년 조선 후기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흔히 ‘반봉건·반외세 운동’으로 요약된다. 하지만 이 단순한 도식으로는 이 운동의 진정한 의미와 깊이를 담아내기 어렵다. 동학농민운동은 조선의 뿌리 깊은 사회적 모순과 외세의 압력 속에서 터져나온 복합적인 민중운동이었다. ‘반란’이 아닌 ‘혁명’에 가까웠다는 평가도 있을 정도다.동학(東學)은 본래 최제우가 창시한 신종교로, 유교·불교·도교를 융합한 평등 사상을 중심에 두고 있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는 사상은 신분제 사회에서 억눌린 민중들에게 강한 울림을 주었다. 이 신념은 단지 종교적 구호에 그치지 않고, 사회 ..
조선시대에도 존재한 ‘미혼모’와 ‘양녀제도’ 조선시대에도 존재한 ‘미혼모’와 ‘양녀제도’ — 조선 사회의 숨겨진 여성과 아이들의 이야기.조선시대에도 ‘미혼모’가 있었다?조선은 유교적 가족제도가 뿌리 깊게 자리한 사회였지만, 그 틀 밖에서도 여전히 인간사는 반복되었습니다. 특히 전쟁, 기근, 노비 해방, 납치와 유기 등의 사유로 인해 혼인 제도 밖에서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한 여성들, 즉 ‘미혼모’는 조선시대에도 엄연히 존재했습니다. 다만 이들의 존재는 공적인 기록에서 지워지거나 왜곡되기 일쑤였습니다.대표적인 예로, 조선 후기 노비 해방과 도망노비 증가로 인해 많은 여성들이 불안정한 사회적 지위에 놓이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임신 후 남성에게 버림받는 사례가 적지 않았습니다. 또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전쟁의 여파로 수많은 백성들이 유랑하면서 가족과..
광해군을 몰아낸 진짜 이유는? 광해군을 몰아낸 진짜 이유는?— ‘인조반정’의 배경과 그 이면에 숨겨진 권력의 민낯 1. 명분은 ‘친명(親明) 회복’, 그러나 실상은?1623년, 조선 역사에 큰 전환점을 만든 사건인 ‘인조반정’은 흔히 “친명 정책을 되찾기 위한 사대부들의 정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조선은 명나라와 청나라(후금) 사이에서 극도로 예민한 외교적 줄타기를 하고 있었고, 광해군은 실리를 중시한 ‘중립외교’를 펼쳤습니다. 그는 명나라에 형식적으로 조공을 하면서도, 점차 성장하는 후금과도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사대(事大) 정신에 입각해 명나라 중심 질서를 고수하던 대신들은 이러한 광해군의 태도를 ‘배명사청(背明事淸)’이라 비판하며, 결국 반정을 일으키게 됩니다.그러나 단순히 외교 정책의 차이만으로 국왕..
바다 위의 철갑전함, ‘거북선’은 어떻게 싸웠는가? 바다 위의 철갑전함, ‘거북선’은 어떻게 싸웠는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실전 전법과 거북선의 진짜 역할 거북선, 신화인가? 실전 전함인가?임진왜란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중 하나는 바로 '거북선'이다. 전신을 철로 감싼 듯한 모습과 용머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염, 적선을 단숨에 박살낸다는 전설까지. 하지만 이 같은 이미지는 과연 사실일까? 거북선은 신화적인 이미지에 가려져 실전에서 어떤 식으로 사용되었는지는 상대적으로 덜 조명되어 왔다. 실제로 거북선은 조선 수군이 왜군에 맞서 싸우는 데 중요한 전략 자산이었으며, 그 운용 방식 또한 탁월했다.실전에서 거북선은 어떻게 싸웠나?거북선은 철갑선이기 이전에 '공격형 돌격선'이었다. 기본적으로 판옥선과 함께 운용되었으며, 주요 역할은 적진을 돌파하고 적선..
성균관 유생, 왕에게 청원하다 성균관 유생, 왕에게 청원하다— 조선 시대 지식인의 집단 시위와 만인소의 정치적 위력 1. 성균관 유생은 누구였는가?성균관 유생은 조선의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에서 수학하던 학생들로, 오늘날로 치면 엘리트 관료 지망생에 해당합니다. 과거 시험 준비는 물론 유교 경전에 능통하며, 정치·사회적 감각도 갖춘 인재로 여겨졌습니다. 이들은 학문을 넘어 정치적 비판과 여론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때로는 왕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성균관 유생들은 단순한 학생이 아니었습니다. 조선 사회에서 유교적 가치가 권위의 근간이었기 때문에, 유생들은 도덕적 정당성을 갖춘 집단으로 존중받았습니다. 이들의 목소리는 곧 '공론'으로 간주되며, 왕조차도 쉽게 무시하지 못했습니다.2. 유생들의 집단 상소와 시위는 왜 벌어졌을까..